긴 하루 - 이유미 [사물의 시선] 이전의 기분이 어땠든 일단 웨딩드레스숍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연인은 행복해진다. 숍 문을 열기 전까지 다투고 짜증냈던 사람들도 나를 보는 순간 만큼은 앞날의 우려와 고민을 잠시나마 잊는다. 나로선 상상할 수 조차 없이 많은 절차와 결정에 결혼식을 마칠 때까지 두통이 사라지지 않겠지만, 여기 들어와서 나를 바라보고 손으로 매만져볼 땐 세상의 주인공이 된 듯한 미소는 두 사람의 몫이다.나는 언제나 이런 분위기를 즐긴다. 나를 둘러싼 사람들의 분에 넘치는 감정은 오로지 나만이 느끼게 해줄 수 있는 것이라고 자부한다. 그 어떤 사물도 나보다 그들을 빛나게 해줄 수 없다는 걸 알기에 내가 느끼는 완벽에 가까운 보람은 쉽게 사그라들지 않는다. 한 커플이 들어왔다.이들에게 동행한 나이든 부모는 없다. 그들은 아직 결혼식 날짜를 정한 커플이 아니다. 이제 막 낮기온이 10도를 넘기 시작해 모처럼 옷차림이 가벼워진 주말, 배불리 먹은 브런치를 소화시킬 겸 거리를 산책하다가 쇼윈도에 비친 나를 보고 걸음이 멈춰졌다. 한참을 나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던 여자를 바라보던 남자는 고개를 살짝 갸우뚱 하더니 이내 뭔가를 알았다는 듯 여자의 손을 잡고 숍 문을 열었다. 예상치 못한 그의 행동에 여자는 당혹의 기미를 보이면서도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아니 오히려 기뻤다. 남자가 잡은 손에선 믿음이 느껴졌다. 여자들은 확신을 좋아한다. 그들은 숍 주인이자 날 만든 K에게 나를 입어볼 수 있는지 묻는다. 얼마든지요. 흔쾌히 대답한 K는 딱딱한 마네킹에서 나를 조심히 벗겨내 여자가 입는 걸 도왔다. 화장을 완벽하게 하지 않아도 틀어 올린 머리카락이 조금 빠져나와도 나는 그녀를 세상 그 누구보다 아름답게 만든다. 내가 여기 놓인 순간부터 단 한번도 나를 향한 사람들의 눈빛에서 모든 걸 가진 자들의 표정을 얻어내지 못한 적은 없으니까. 드레스를 입어보고 감탄하는 오늘은 나와 그들에게 매우 짧다.날 입은 그녀들이 평생 잊을 수 없는 결혼식이 지나갔다. 4번의 축복. 식이 끝난 뒤 깨끗히 세탁된 나는다시 숍에 전시된다. 전과 달라진 거라고는 커다란 쇼윈도 핀 조명 아래의 마네킹이 아닌 숍 안쪽에 더 많은 웨딩드레스들 사이에 걸렸다는 점. K의 낯선 결정이 조금 의아하긴 했지만 사람들을 감격하게 만들 수 있는 힘이 내겐 여전하기에 크게 마음 쓰이지 않는다. 더 많은 연인들은 끊임없이 이곳에 드나든다. 4번의 결혼식 이후 예비 부부들은 수없이 다녀갔지만 나는 선택되지 못했다. 이게 다 자리 때문일거야. 나를 왜 마네킹에 입혀두지 않는거지? 나도 모르게 순백이 미색으로 바라고 촘촘히 박혔던 비즈들이 눈치채지 못할만큼 떨어졌다. K는 나를 수선해주지 않는다. 어둡고 어색한 곳에서의 시간은 흐른다. 답답하다가 울적해진다. 며칠이 지나면 나는 다시 가장 화려한 조명 아래 선 마네킹에게 돌아갈 수 있을 거라 믿는다. 나는 여전히 눈 부시게 아름다운 웨딩드레스가 아닌가. K, 나를 좀 더 환한 곳으로 데려다 줘요. 설렘으로 이곳을 방문한 연인들이 나를 보고 감탄할 수 있게요. 그들은 나를 보고 싶어할 거라고요. 여기에 있으면 더 이상 그들이 날 고를 수 없잖아요! 소리 없이 외쳐보지만 K는 듣지 못한다. 아니 K조차 날 찾아주지 않는다. 그로부터 달력은 3장이 넘겨졌다. 하루가 멀다하고 사람들의 지목을 받던 나는 너무 긴 시간동안 혼자였다. 왜 이런 시간이 계속 이어지는지 나로선 알 길이 없다. 오늘 K는 중대한 결심이라도 한 눈빛으로 드레스들을 하나씩 체크하고 확인한다. 그래요 K 여기 내가 있다고요! 나를 찾는 거죠? 잊지 않았을 줄 알았어요. 신중히 무언가를 살펴보고 고른 K가 나를 집었다. 테이블 위에 툭 던져진 난 전과 조금 다른 K의 손길을 느꼈다. 그렇게 2개의 드레스가 더 선택됐다. 이번에는 이렇게 3벌이 될 것 같군. K가 혼잣말을 했다. 조금 뜯어지고 색이 바랜 우리를 새롭게 만들어주려는 거겠지? 희망에 확신이 없는 난 긴장되고 두렵다. K는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문 밖을 살핀다. 왠지 오늘이 매우 길 것 같은 예감이 든다.